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평의 입락 (문단 편집) === 낙동전 === 용문 전투 후 몽골이 이 틈을 타서 낙양성에 진을 쳤다.송군은 원조가 없고 양식이 없는 반면 낙양성은 어른이 적어 성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감군 서민자는 몽군의 주력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 포위하여 회군하기로 했다.낙양의 송군은 몽골군의 부대를 습격해 송군의 주력을 엄호하는 한편 8월 초 낙수를 건너 배수진을 쳤다. 8월 초하루 몽골군이 먼저 공세를 취하면서 송군 진영에 여러 차례 공격을 가했다. 송군은 전투가 완강하여 누차 몽골군을 물리쳤다. 쌍방의 승부가 대등하였다. 8월 2일 몽골군은 보병 방패막이로 전진해 송군의 전열을 세 부분으로 차단하고 기병으로 다시 돌진했다.송군은 보병 대진을 등에 업고 정오까지 싸워 400여 명을 살상하고 방패 300여 면을 빼앗아 다시 몽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송군은 정면 전투에서 밀리지 않았지만 나흘째 식량이 끊기는 등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서민자는 동쪽의 몽군을 주력으로 보고 송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포위를 돌진했다. 몽골군은 송군이 포위를 뚫은 것을 알고 기마사수로 뒤에서 추격하여 죽였다. 절대 다수가 보병인 송군은 도망가는 길에 죽임을 당했고 송군은 거의 전사한 상태였다. 서민자는 8월 11일 300명의 군대를 대동하고 남송 광주로 허겁지겁 탈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